2-1. 젖은 마음

 

우산 속에서 너는

내 손을 처음 잡아주었던 것 같다

나는 반대쪽 어깨가 흠뻑 젖었는데

젖어가는 마음이 좋아 그냥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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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서 와, 지구는 처음이지?

 

그런데 1억 광년 거리에 있는 어느 은하계에서 게시판 하나 솟아오른 것을 발견했지요. 그 게시판에는, <나는 너를 보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무서워서 그랬다. 한때 공무원 학원에 다녔었다. 대학 졸업 학기였다. 투명하지만 단단하고 뾰족한 벽이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학교 후문에 있는 80만원 정액의 9급 공무원 대비 종합반을 통해, 그 담을 뛰어넘으려 했다. 아님, 담의 일부가 되려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구를 함께 치던 동기와 같은 학원에 동시에 등록했다. 나름대로 안정된 미래를 꿈꾸며 짐짓 어깨를 폈던 것도 사실이다.

친구는 절박함을 안다. 늘 최선을 다하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당구를 치든, 중간고사를 보든,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녀석이 훗날 합격의 희소식을 들려주게 될, 시험을 치르고 학교 후문 유흥가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는 시험을 망친 것 같다며, 나에게 고기를 요구했다. 그는 절박하게 상추에 고기를 담아 입에 가져갔다. 그게 붙은 시험인 줄 알았다면, 돼지갈비 값을 내가 내지는 않았을 텐데.

그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자리를 차지한 정독실에서 친구는 영어 독해에 열심이었고, 나는 연습장에 시 비슷한 것을 끼적이고 있었다. 친구가 내 자리로 스윽 오더니 어깨를 툭 친다.

 

, 이 외계인 같은 놈아.

그냥 너는 지구를 떠나라.

거기서 시를 써라.

여기서 뭐하냐?

 

무서워서 거기에 못 갔는데, 그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라고, 어깨를 툭툭 쳐댔다.

 

*

 

부모님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소식을 듣게 된 건 교육청 공무원인 친구였다. 한창 근무 중이던 그는 속삭이듯 전화를 받다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사투리를 뱉었다. 뭐냐? 진짜냐?

무서웠다. 의사는 짧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 후, 진지한 얼굴로 복잡한 말을 했다. 절박유산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발사되었을 때, 나는 그걸 이미 유산이 됐다는 말로 알아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었다.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다. 절박유산은 임신 초기에 출혈이 있고, 출혈로 인해서 자연유산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증세라고 한다. 초음파 사진에서 아이의 자리 옆에 시커먼 뭔가가 있었고, 의사는 그것이 피라고 했다. 푹 쉬는 것이 최고라고 하면서. 우리는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바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무서움을 겨우 숨긴 나는 대신 끝없이 절박해져서, 괜찮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질린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서, 갑자기 과장된 몸짓을 하고서, 아내를 부축하고(그녀는 거부했다), 부산을 떨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그녀가 트위터 좀 작작하라고 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부리나케 병원으로 오고 있는 예비 장모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 때문에 질렸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무서웠다.

초음파 사진에는 거대한 우주가 있었다. 아주 시커멓거나 조금 덜 시커먼 것들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거기에 땅콩만한 은재가 들어 있었다. 절박하게 몸을 말고서. 훗날 절박유산이 염색체 이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얻었을 때도 도리어 아이가 더 대견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나오기 위해 너는, 최선을 다했던 거구나.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로 오려고. 무섭지 않았니?

 

고된 훈련을 받은 우주인처럼

모든 게 처음인 아이가

찬찬히 그리고 열심히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자신 아랫배에 자리한 작은 우주를 최대한으로 키워나갔다. 그녀는 곧 몸을 추슬러 병원 바깥으로 뱃속 우주를 꺼내왔다. 아이는 그곳에서 팔다리가 나오고, 표정이 생기고, 영양분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홀로, 덥고 재미없는 지구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가장 해야 할 일이 많은 이는 결국 아이였다. 나는 그 절박함을 따라서, 더 강건해지면 되는 거였다. 지구인이니까.

 

*

 

친구에게 어깨가 떠밀려 고시원에 돌아왔다. 일단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그리고 뭔가를 진지하게 끼적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자면, 누우면 발끝이 문턱에 닿았던 그 고시원은 사실, 우주를 떠도는 캡슐비행선이었다. 나는 시커먼 캡슐에 쭈그려 앉아 될 대로 되겠지, 중얼거리며 시를 썼다. 캡슐 바깥의 세상은 아름답고 무서웠다. 지구인 친구들이 절박한 마음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질감을 느끼려 노력하며 시를 썼다. 행성과 운성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비행은 결국 실패했다. 시 쓰는 일은 취업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완성된 시 중에 지금 갖고 있는 것은 한 편도 없다. 모두 우주 정류장에 버렸다. 다만, 어떤 태도를 완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걸 절박함이라고 불러도 될까. 약간은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무서움은 아니다.

공무원 학원에 계속 나간 친구는 가끔 방문을 두드리고 맥주를 내밀며 캡슐 속 나를 구출하곤 했다. 녀석이 아니었으면 난 우주 미아가 됐을 것이다. 훗날 알고 보니, 친구는 그날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잘 기억하지 못했고, 만약에 그랬다면 날마다 커피를 마시자는 둥, 당구 한 게임 치자는 둥 공부를 방해했던 나를 시야에서 없애버리기 위한 책략이 아니었겠냐며 반문한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귀한 시간이었다. 이윽고 나는 지구로 돌아왔다. 지금은 우주 속 아이의 귀환을 기다린다.

아이의 좋은 지구인 친구가 되고 싶다. 땅콩이가 마음껏 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때가 되면 아이의 어깨 툭 치며, 너의 세계로 전진하라고. 거기가 지구 바깥이어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을까. 달력 예닐곱 장을 넘기면 아이가 온다. 우리는 공무원처럼 점잖게, 지구인처럼 간절히,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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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nnnn 2013.08.30 17:13

5. 존중되는 취향

 

뭐라고요?” 소년이 소리쳤다. “뭐요? 난 안 가요!”

-윌리엄 포크너

 

 

엄마는 너를 배에 담고 아빠는 그 배를 바라보며 전전긍긍하거나 파안대소하면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저가 항공의 비행기는 앞뒤가 짧아, 무릎을 옹송그리고 모은 채였어. 아마 땅콩이 너와 비슷한 자세였을 거다. 아빠는 조금 불편했다. 배가 나왔기 때문이지. 쉽게 굽혀지고 펴지는 몸이 아닌지 오래되었다. 작고 동그란 창 아래 우리나라가 누워 있었다.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선명했는데, 골프장처럼 보였어. 우리나라에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렇게 많나 보구나. 아님 땅을 파헤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던지. 아빠는 아무 쪽도 아니다. 골프는 아빠의 취향이 아냐. 땅에 관심가질 만한 사정은 더욱 아니지. 아빠의 취향은 시끄럽고 별 볼일 없는 우리나라 남자들과 비슷하단다. 야구와 축구를 좋아하고, 그중 잘하는 것은…… 없고, 굳이 찾자면 당구를 잘 치고.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땅콩아, 너에게 아빠를 설명하고 싶구나. 아빠의 과거, 아빠의 비밀, 아빠의 실수 그런 것은 아니고, 취향에 대해서 말이다. 가끔 취향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되기도 하단다. 그리고 지금 엄마 아빠는 신혼여행을 가고 있어. 사실 우리 둘은 모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엄마 방에 웅크려 인터넷 세상의 파도에 몸을 맡기길 즐겨 해. 나는 동네를 빨빨거리며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건 여행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역시……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랄 밖에. 그러니 땅콩이 네가 더 자라서, 아빠에게 이렇게 묻는 날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빠, 어디 가?” 아빠는 되도록 어딜 안 가고 싶은데, 생각처럼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야. 누군가에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실토하고 나면, 여행에 관한 그 지긋지긋한 화제가 바뀌기는커녕, 여행을 기피하는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느라 아빠는 아주 진땀을 뺀다. 아무리 설명해봐야, 상대방은 이렇게 말하고 말아. 여행을 안 다녀 버릇해서 그런 거야. 한번 훌훌 털고 떠나봐. 아니, 그냥, 잘 모르겠고, 여행을 싫어한다니까? 집과 동네가 좋다니까 그러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찾는…… 그러면 아빠는 조용히 거짓된 고백을 하고 말아. 여행할 돈이 없어서 그래. 그때서야 맞은편 친구는 내 입장을 이해해주더구나. 여행갈 돈이 없었던, 다소 게으른 청년의 한심함을 말이야. 돈이 없었던 게 아주 거짓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른 데에 관심이 많았을 뿐인데, 거참 고약하더구나. 물론 이번 여행에 있어서도 고약한 일은 꽤 있었단다. 친절한 사람들의 강력한 추천을 들으며, 그곳을 가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거든. 푸켓, 보라카이, 몰디브, 하와이, 팔라우, 방콕, 삿포로, 파리, 런던, 상파울루, 요하네스버그, 그래 더 말해봐, 지구의 끝? 남극? 밀림? 사막? 신혼여행이니까. 생애 단 한번이니까. 더 말해보라고. 물론 이런 시비조는 삼갔다. 그저 땅콩이 네 핑계를 댈 뿐이었지. 그리고 아주 중요한 문제도 있었어. 엄마 아빠는 모두 여권이 없었거든. 여권은 뭐에 쓰는 물건이지? 권법 같은 건가? 잠깐 바다가 보이고, 다시 육지가 보였어. 저걸 사람들은 섬이라 부르지. 땅콩아 넌 우주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이미 다 알겠지만, 지구 위의 땅은 사실 모두 섬이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그저 섬인 셈이지. 섬 속의 섬. 섬 바깥의 또 섬. 어쩌면, 그래 섬. 섬에 도착했어. 예약한 렌터카 업체를 찾아가야 했어. 생각보다 차가 좋지 않더구나.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도 같고. 알고 보니 아빠가 조작법을 잘 몰랐던 거긴 했지만. 어쨌든 빌린 차의 인터페이스는 직관적이지 않았단다. 아빠와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서로 잘 맞아.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사뭇 다르단다. 엄마는 영화를 좋아해. 아빠는 영화를 즐겨보지 않아. 이를 설명하는 일 또한 몹시 어려워! 왜 사람들은 여행과 영화에 모든 사람이 훈훈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걸까. 우리에겐 세상 무엇에게도 가리지 않고, 심드렁할 자유가 있어야 해. 아빠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단다. 그러나 아빠의 동료들은 사람의 겉만 보고 쉽게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담배를 스윽 권하기도 해. 담배 피우는 사람은 자랑스러워해야 할 걸. 아빠의 외양이 흡연자를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니. 내가 얼마나 선량하게 생겼는데! 아빠가 좋아하는 것은 커피야. 아침엔 믹스 커피, 점심엔 아메리카노, 저녁엔 카페라떼. 이정도면 취향이라고 할 수 있나? 원두 이름을 알려달라고? 글쎄 그건 동서식품이나 스타벅스, 혹은 동네 카페에서 물어보는 게 좋겠구나. 아빠는 원두 이름을 알 정도까지 커피를 좋아하는 게 아냐. 그게 취향이냐고? 땅콩아, 이제까지 아빠 말을 허투루 들었구나. 느슨한 취향도 얼마든지 훌륭한 취향이 될 수 있다고 아빠는 그렇게 믿는다. 엄마는 여행 기간의 8할을 입이 삐쭉 나와서 지냈단다. 그게 엄마의 취향일지도 모르지. 일단, 우리는 여행을 싫어하잖니. 이번 여행이 시작되자, 땅콩이 네 발차기가 시작됐다고 해. 그러기엔 조금 빠르지 않나? 그건 엄마만의 느낌일 수도 있어. 엄마는 느낌을 중시하거든. 땅콩이 너에게서는 좋은 느낌이 온대. 아빠도 그 느낌만은 완전히 믿기로 했단다. 섬에는 명소도 많았고, 좋은 식당도 많았어.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뜨내기에 불과했고,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둘 수는 없는 일이었지. 요약하자면, 바다보다는 내륙이 좋았어. 화산폭발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능선을 사랑하게 되었지. 아빠는 여수 앞 바다가 더 좋아. 엄마의 고향이니까. 호텔에서 기분을 내려 조식 뷔페를 먹었는데, 그저 그랬어. 아빠는 아침에 조금이라도 자는 걸 좋아해. 엄마는 그런 아빠를 싫어하는 것도 같고. 돌아오는 비행기 역시 좁았어. 자유석이라서 하마터면 엄마와 아빠가 떨어져 앉을 뻔했지 뭐야. 아빠가 대기 시간에 맞춰 화장실에 갔기 때문이었지. 이놈의 방광은 참 속도 좁아서는. 엄마는 입이 앞으로 더 나왔단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지. 아빠는 자꾸만 실수를 했어. 작은 실수에 세상은 망하지 않아. 다만, 엄마의 화를 돋을 뿐이지. 거기에 아빠는 익숙해지기도 했단다. 엄마 달래기 세계챔피언은 아직까지는 바로 나야. 이 소중한 노하우는 땅콩아, 네가 태어나고 나서 공유하도록 하자.

 

아빠는 땅콩이가 태어나 가질 취향이 궁금해. 어떤 음악을, 어떤 그림을, 어떤 책을 좋아할까, 기대 돼. 혹시 취향이 새로 산 퍼즐처럼 여기저기 흩어지고 다시 모여 조립되어 나갈 때, 아빠가 추천한 어떤 것이 그 자릴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빠와 엄마는 소설을 좋아해. 아빠는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겠지?

 

아빠는 여행을 떠나면 이래. 긴장되고 분열돼. 괜찮아? 그럼 괜찮지. 그것도 취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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