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향하고 움직인다. 그들은 천천히, 어떤 장난의 기색도 없이 춤을 춘다.

-밀란 쿤데라 향수

 

물론 양수검사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숙제검사 같은 건가? 검사는 사람을 떨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나는 숙제를 잘해가는 학생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쉬는 시간에 친구 숙제를 재빠르게 베껴서 위기를 넘기는 타입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날 선생이 숙제를 내준 것을 깜빡 잊고 넘어가길 바라는 유형이었다. 운수에 제 몸을 완연히 맡기는 것이다.

쿼드검사가 먼저였다. 수치가 약간 높다고 했다. 높다, 낮다, 크다, 작다, 빠르다, 느리다…… 동사 앞에 자리하는 부사는 앞선 단어들을 흔든다. 흔들려서 초점이 흐려진다. 약간 높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약간이니까 괜찮은 건지도 몰랐다. 아니다.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약간도 하지 않았다. 약간이라는 말에 대해 여전히 자신은 없지만.

수치가 아주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양수검사를 받는 게 좋다고 의사는 말했다. 짧은 머리에 단정한 입매를 가진 여자 의사였다. 가운을 벗으면 같은 단지 아파트에 인상 좋은 아주머니라고 해도 될 성 싶었다. 나는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작은 눈이라 껌벅거리기 쉬웠다. 아내 또한 그랬다. 아내 눈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날 우리는 유난히 눈을 자주 감았다 떴다. 단정한 입매를 골똘히 쳐다보면서.

 

검사는 받지 않기로 했다.

 

초음파는 다른 의사에게 받아야 했다.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의사는 원래 곱슬머리인지 아님 미용실에서 펌을 한 것인지 머리카락이 심상치 않았다. ‘곱슬머리하면 내 머리도 만만치는 않다만, 의사는 게다가 반은 장발이었다. 그가 아까 피운 담배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왜 양수검사를 안 받은 거지요. 다음 검사까지 목둘레나 허벅지 길이가 이런 식이면 다운증후군이 거의 확실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담배냄새가 흰자위로 파고들어왔다. 눈이 매웠다. 자욱한 최루탄이 깔린 대로를 바라보는 소년처럼 불안해졌다.

정상 범위 안에 있네요. 그는 2주 후에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말이 짧았던 것 같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내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느낌 탓일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

 

검사를 받지 않길 잘했다.

 

검사 결과를 듣고 우리는 모종의 판단을 내렸어야 했을 것이다. 괴로웠을 것이다. 검사는 다른 검사를 요구했겠지. 우리는 우리 부부의 마음을, 심장을, 사랑을, 미래를 샅샅이 검사했을 것이다. 아주 탈탈 털어서, 먼지가 풀풀 날렸을 것이다. 우리는 콜록거리며 눈물을 핑계 대며 하기 싫은 숙제처럼 그 일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다. 그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지만, 그들과 같은 결정을 나 또한 선택했다면, 나는 나를, 아내는 아내를,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오래 두고서 바라보지 못했을 것 같다.

대신 다른 검사를 평생 감수해야 할 예감이다. 숙제는 했는지, 공부를 잘하는지, 건강은 유지되고 있는지, 신용이 좋은지 검사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내 선택 아닌 선택이 온당하고 바름을 증명해낼 것이고 그 일을 성실히 잘하고 있음을 검사할 것이다. 날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삶은 은근한 지속에 더한 가치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결국 내키는 대로 사는 자가 이룰 일이다. 나는 이일이 선뜻 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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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젖은 마음

 

우산 속에서 너는

내 손을 처음 잡아주었던 것 같다

나는 반대쪽 어깨가 흠뻑 젖었는데

젖어가는 마음이 좋아 그냥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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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서 와, 지구는 처음이지?

 

그런데 1억 광년 거리에 있는 어느 은하계에서 게시판 하나 솟아오른 것을 발견했지요. 그 게시판에는, <나는 너를 보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무서워서 그랬다. 한때 공무원 학원에 다녔었다. 대학 졸업 학기였다. 투명하지만 단단하고 뾰족한 벽이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학교 후문에 있는 80만원 정액의 9급 공무원 대비 종합반을 통해, 그 담을 뛰어넘으려 했다. 아님, 담의 일부가 되려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구를 함께 치던 동기와 같은 학원에 동시에 등록했다. 나름대로 안정된 미래를 꿈꾸며 짐짓 어깨를 폈던 것도 사실이다.

친구는 절박함을 안다. 늘 최선을 다하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당구를 치든, 중간고사를 보든,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녀석이 훗날 합격의 희소식을 들려주게 될, 시험을 치르고 학교 후문 유흥가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는 시험을 망친 것 같다며, 나에게 고기를 요구했다. 그는 절박하게 상추에 고기를 담아 입에 가져갔다. 그게 붙은 시험인 줄 알았다면, 돼지갈비 값을 내가 내지는 않았을 텐데.

그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자리를 차지한 정독실에서 친구는 영어 독해에 열심이었고, 나는 연습장에 시 비슷한 것을 끼적이고 있었다. 친구가 내 자리로 스윽 오더니 어깨를 툭 친다.

 

, 이 외계인 같은 놈아.

그냥 너는 지구를 떠나라.

거기서 시를 써라.

여기서 뭐하냐?

 

무서워서 거기에 못 갔는데, 그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라고, 어깨를 툭툭 쳐댔다.

 

*

 

부모님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소식을 듣게 된 건 교육청 공무원인 친구였다. 한창 근무 중이던 그는 속삭이듯 전화를 받다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사투리를 뱉었다. 뭐냐? 진짜냐?

무서웠다. 의사는 짧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 후, 진지한 얼굴로 복잡한 말을 했다. 절박유산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발사되었을 때, 나는 그걸 이미 유산이 됐다는 말로 알아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었다.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다. 절박유산은 임신 초기에 출혈이 있고, 출혈로 인해서 자연유산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증세라고 한다. 초음파 사진에서 아이의 자리 옆에 시커먼 뭔가가 있었고, 의사는 그것이 피라고 했다. 푹 쉬는 것이 최고라고 하면서. 우리는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바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무서움을 겨우 숨긴 나는 대신 끝없이 절박해져서, 괜찮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질린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서, 갑자기 과장된 몸짓을 하고서, 아내를 부축하고(그녀는 거부했다), 부산을 떨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그녀가 트위터 좀 작작하라고 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부리나케 병원으로 오고 있는 예비 장모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 때문에 질렸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무서웠다.

초음파 사진에는 거대한 우주가 있었다. 아주 시커멓거나 조금 덜 시커먼 것들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거기에 땅콩만한 은재가 들어 있었다. 절박하게 몸을 말고서. 훗날 절박유산이 염색체 이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얻었을 때도 도리어 아이가 더 대견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나오기 위해 너는, 최선을 다했던 거구나.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로 오려고. 무섭지 않았니?

 

고된 훈련을 받은 우주인처럼

모든 게 처음인 아이가

찬찬히 그리고 열심히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자신 아랫배에 자리한 작은 우주를 최대한으로 키워나갔다. 그녀는 곧 몸을 추슬러 병원 바깥으로 뱃속 우주를 꺼내왔다. 아이는 그곳에서 팔다리가 나오고, 표정이 생기고, 영양분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홀로, 덥고 재미없는 지구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가장 해야 할 일이 많은 이는 결국 아이였다. 나는 그 절박함을 따라서, 더 강건해지면 되는 거였다. 지구인이니까.

 

*

 

친구에게 어깨가 떠밀려 고시원에 돌아왔다. 일단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그리고 뭔가를 진지하게 끼적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자면, 누우면 발끝이 문턱에 닿았던 그 고시원은 사실, 우주를 떠도는 캡슐비행선이었다. 나는 시커먼 캡슐에 쭈그려 앉아 될 대로 되겠지, 중얼거리며 시를 썼다. 캡슐 바깥의 세상은 아름답고 무서웠다. 지구인 친구들이 절박한 마음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질감을 느끼려 노력하며 시를 썼다. 행성과 운성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비행은 결국 실패했다. 시 쓰는 일은 취업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완성된 시 중에 지금 갖고 있는 것은 한 편도 없다. 모두 우주 정류장에 버렸다. 다만, 어떤 태도를 완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걸 절박함이라고 불러도 될까. 약간은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무서움은 아니다.

공무원 학원에 계속 나간 친구는 가끔 방문을 두드리고 맥주를 내밀며 캡슐 속 나를 구출하곤 했다. 녀석이 아니었으면 난 우주 미아가 됐을 것이다. 훗날 알고 보니, 친구는 그날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잘 기억하지 못했고, 만약에 그랬다면 날마다 커피를 마시자는 둥, 당구 한 게임 치자는 둥 공부를 방해했던 나를 시야에서 없애버리기 위한 책략이 아니었겠냐며 반문한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귀한 시간이었다. 이윽고 나는 지구로 돌아왔다. 지금은 우주 속 아이의 귀환을 기다린다.

아이의 좋은 지구인 친구가 되고 싶다. 땅콩이가 마음껏 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때가 되면 아이의 어깨 툭 치며, 너의 세계로 전진하라고. 거기가 지구 바깥이어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을까. 달력 예닐곱 장을 넘기면 아이가 온다. 우리는 공무원처럼 점잖게, 지구인처럼 간절히,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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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존중되는 취향

 

뭐라고요?” 소년이 소리쳤다. “뭐요? 난 안 가요!”

-윌리엄 포크너

 

 

엄마는 너를 배에 담고 아빠는 그 배를 바라보며 전전긍긍하거나 파안대소하면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저가 항공의 비행기는 앞뒤가 짧아, 무릎을 옹송그리고 모은 채였어. 아마 땅콩이 너와 비슷한 자세였을 거다. 아빠는 조금 불편했다. 배가 나왔기 때문이지. 쉽게 굽혀지고 펴지는 몸이 아닌지 오래되었다. 작고 동그란 창 아래 우리나라가 누워 있었다.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선명했는데, 골프장처럼 보였어. 우리나라에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렇게 많나 보구나. 아님 땅을 파헤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던지. 아빠는 아무 쪽도 아니다. 골프는 아빠의 취향이 아냐. 땅에 관심가질 만한 사정은 더욱 아니지. 아빠의 취향은 시끄럽고 별 볼일 없는 우리나라 남자들과 비슷하단다. 야구와 축구를 좋아하고, 그중 잘하는 것은…… 없고, 굳이 찾자면 당구를 잘 치고.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땅콩아, 너에게 아빠를 설명하고 싶구나. 아빠의 과거, 아빠의 비밀, 아빠의 실수 그런 것은 아니고, 취향에 대해서 말이다. 가끔 취향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되기도 하단다. 그리고 지금 엄마 아빠는 신혼여행을 가고 있어. 사실 우리 둘은 모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엄마 방에 웅크려 인터넷 세상의 파도에 몸을 맡기길 즐겨 해. 나는 동네를 빨빨거리며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건 여행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역시……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랄 밖에. 그러니 땅콩이 네가 더 자라서, 아빠에게 이렇게 묻는 날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빠, 어디 가?” 아빠는 되도록 어딜 안 가고 싶은데, 생각처럼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야. 누군가에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실토하고 나면, 여행에 관한 그 지긋지긋한 화제가 바뀌기는커녕, 여행을 기피하는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느라 아빠는 아주 진땀을 뺀다. 아무리 설명해봐야, 상대방은 이렇게 말하고 말아. 여행을 안 다녀 버릇해서 그런 거야. 한번 훌훌 털고 떠나봐. 아니, 그냥, 잘 모르겠고, 여행을 싫어한다니까? 집과 동네가 좋다니까 그러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찾는…… 그러면 아빠는 조용히 거짓된 고백을 하고 말아. 여행할 돈이 없어서 그래. 그때서야 맞은편 친구는 내 입장을 이해해주더구나. 여행갈 돈이 없었던, 다소 게으른 청년의 한심함을 말이야. 돈이 없었던 게 아주 거짓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른 데에 관심이 많았을 뿐인데, 거참 고약하더구나. 물론 이번 여행에 있어서도 고약한 일은 꽤 있었단다. 친절한 사람들의 강력한 추천을 들으며, 그곳을 가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거든. 푸켓, 보라카이, 몰디브, 하와이, 팔라우, 방콕, 삿포로, 파리, 런던, 상파울루, 요하네스버그, 그래 더 말해봐, 지구의 끝? 남극? 밀림? 사막? 신혼여행이니까. 생애 단 한번이니까. 더 말해보라고. 물론 이런 시비조는 삼갔다. 그저 땅콩이 네 핑계를 댈 뿐이었지. 그리고 아주 중요한 문제도 있었어. 엄마 아빠는 모두 여권이 없었거든. 여권은 뭐에 쓰는 물건이지? 권법 같은 건가? 잠깐 바다가 보이고, 다시 육지가 보였어. 저걸 사람들은 섬이라 부르지. 땅콩아 넌 우주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이미 다 알겠지만, 지구 위의 땅은 사실 모두 섬이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그저 섬인 셈이지. 섬 속의 섬. 섬 바깥의 또 섬. 어쩌면, 그래 섬. 섬에 도착했어. 예약한 렌터카 업체를 찾아가야 했어. 생각보다 차가 좋지 않더구나.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도 같고. 알고 보니 아빠가 조작법을 잘 몰랐던 거긴 했지만. 어쨌든 빌린 차의 인터페이스는 직관적이지 않았단다. 아빠와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서로 잘 맞아.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사뭇 다르단다. 엄마는 영화를 좋아해. 아빠는 영화를 즐겨보지 않아. 이를 설명하는 일 또한 몹시 어려워! 왜 사람들은 여행과 영화에 모든 사람이 훈훈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걸까. 우리에겐 세상 무엇에게도 가리지 않고, 심드렁할 자유가 있어야 해. 아빠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단다. 그러나 아빠의 동료들은 사람의 겉만 보고 쉽게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담배를 스윽 권하기도 해. 담배 피우는 사람은 자랑스러워해야 할 걸. 아빠의 외양이 흡연자를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니. 내가 얼마나 선량하게 생겼는데! 아빠가 좋아하는 것은 커피야. 아침엔 믹스 커피, 점심엔 아메리카노, 저녁엔 카페라떼. 이정도면 취향이라고 할 수 있나? 원두 이름을 알려달라고? 글쎄 그건 동서식품이나 스타벅스, 혹은 동네 카페에서 물어보는 게 좋겠구나. 아빠는 원두 이름을 알 정도까지 커피를 좋아하는 게 아냐. 그게 취향이냐고? 땅콩아, 이제까지 아빠 말을 허투루 들었구나. 느슨한 취향도 얼마든지 훌륭한 취향이 될 수 있다고 아빠는 그렇게 믿는다. 엄마는 여행 기간의 8할을 입이 삐쭉 나와서 지냈단다. 그게 엄마의 취향일지도 모르지. 일단, 우리는 여행을 싫어하잖니. 이번 여행이 시작되자, 땅콩이 네 발차기가 시작됐다고 해. 그러기엔 조금 빠르지 않나? 그건 엄마만의 느낌일 수도 있어. 엄마는 느낌을 중시하거든. 땅콩이 너에게서는 좋은 느낌이 온대. 아빠도 그 느낌만은 완전히 믿기로 했단다. 섬에는 명소도 많았고, 좋은 식당도 많았어.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뜨내기에 불과했고,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둘 수는 없는 일이었지. 요약하자면, 바다보다는 내륙이 좋았어. 화산폭발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능선을 사랑하게 되었지. 아빠는 여수 앞 바다가 더 좋아. 엄마의 고향이니까. 호텔에서 기분을 내려 조식 뷔페를 먹었는데, 그저 그랬어. 아빠는 아침에 조금이라도 자는 걸 좋아해. 엄마는 그런 아빠를 싫어하는 것도 같고. 돌아오는 비행기 역시 좁았어. 자유석이라서 하마터면 엄마와 아빠가 떨어져 앉을 뻔했지 뭐야. 아빠가 대기 시간에 맞춰 화장실에 갔기 때문이었지. 이놈의 방광은 참 속도 좁아서는. 엄마는 입이 앞으로 더 나왔단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지. 아빠는 자꾸만 실수를 했어. 작은 실수에 세상은 망하지 않아. 다만, 엄마의 화를 돋을 뿐이지. 거기에 아빠는 익숙해지기도 했단다. 엄마 달래기 세계챔피언은 아직까지는 바로 나야. 이 소중한 노하우는 땅콩아, 네가 태어나고 나서 공유하도록 하자.

 

아빠는 땅콩이가 태어나 가질 취향이 궁금해. 어떤 음악을, 어떤 그림을, 어떤 책을 좋아할까, 기대 돼. 혹시 취향이 새로 산 퍼즐처럼 여기저기 흩어지고 다시 모여 조립되어 나갈 때, 아빠가 추천한 어떤 것이 그 자릴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빠와 엄마는 소설을 좋아해. 아빠는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겠지?

 

아빠는 여행을 떠나면 이래. 긴장되고 분열돼. 괜찮아? 그럼 괜찮지. 그것도 취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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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폭우 속 우산

 

우리는 물에 닿았어요. 물은 따뜻하고 정말로 맑았어요. 둥근 조약돌과 작은 고기들이 반짝이는 모습이 물속으로 보였어요. 우리는 물속으로 들어갔어요.

-모신 하미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다니던 학교 후문에는 적당히 촌스럽고 적당히 예쁜 카페가 몇 있었는데, 애인(훗날 나의 아내가 될 분)과 나는 거기 어디 창가에 앉아 생과일주스나 헤이즐넛 같은 걸 먹고 있었던가 보다. 늦은 장마라 꾸물꾸물한 비구름이 창공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쩐 일인지 우리는 꼭 우산을 하나만 갖고 다녔다. 그것도 아담한 사이즈로. 이쯤에서 꼭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무어냐고 묻는 바보는 설마 없겠지.

하늘에서 조그마한 액체들이 슬금슬금 낙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작은 우산 속으로 둘이 들어가 안쪽 어깨를 서로에게 붙이고, 바깥쪽 어깨를 내리는 비에 내주고 걸었다. 애인을 기숙사에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기숙사는 학교로 진입해 자연대와 공대, 운동장 같은 넓은 공간들을 지나쳐야 했다. 도착지는 아직 멀었는데,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누가 하늘에서 물 폭탄을 우리 둘에게 퍽퍽 던지는 것이었다. 우산은 몇 분 되지 않는 시간에 뒤집어져 날아가고, 때 마침 비를 피할 곳은 마땅치가 않고, 애인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뒤범벅 흘리면서 숨이 쉬어지지가 않는다고 했다. 숨이, 숨이 안 쉬어져. 기도가 막혔나봐!

물론 숨이 안 쉬어지는 사람이 호흡이 곤란하다는 식의 의학적 자기 진단을 냉철하게 해낼 수는 없겠지. 애인은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던 것 같다. 대신 완전히 젖어버려서 조금 힘들어했던 건 사실이다. 젖어서 몸에 붙어버린 옷이 부끄러워서 울었던 것도 같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백 팩에 김장독의 배추김치처럼 담겨 있던 5.2kg 중량의 후지쯔 노트북이 걱정이었지만, 입 밖으로 걱정을 꺼내진 않았다. 게릴라처럼 여기저기서 글을 쓰려고 산 노트북이었다. 정작 미니홈피에 사진 올리는 용도로 훨씬 많이 쓰인 기계다. 진짜 게릴라는 내가 아니라 도시를 습격한 대자연이었다. 짧은 시간 우리 앞에 쏟아졌던 비는 그날 저녁 지역 뉴스에 단신으로 다뤄졌다. 게릴라성 폭우.

 

상견례 하는 날, 비가 그렇게 내렸다. 우리 식구가 식당에 먼저 자리했는데, 30분 늦는다는 전갈이 20분 더, 그리고 또 10분 더 늘어나자, 내 초조함과 당혹감 또한 먹지 못한 라면처럼 불어났다. 나는 그때서야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기도가 막히다 못해, 몸 바깥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땅콩만한 아이를 배에 담고서, 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약속 장소에 나오던 아내는 폭우처럼 울어버린 모양이었다. 사춘기인 막내 동생은 막내 동생대로 뭔가 부루퉁해서아마 이 결혼 자체가 맘에 안 들었으리라10대 남자가 주는 반항적 풍모를 폴폴 풍겨냈다. 비가 오든 안 오든 상견례는 원래 어려운 법이라는데! 상견례는 그렇게 예정된 시간에서 1시간을 더해서 시작했다.

 

*밥 먹으면서 트림을 자주하고 쩝쩝 소리를 내는 부장님과의 단 둘이 먹는 점심 백반.

*세상 가장 싫어하는 사람, 그 사실을 모르는 천진한 친구 녀석과 셋이서 먹는 파스타.

*전날 술을 죽자 살자 마시고 결국 살아나서 쓰린 속을 움켜쥐고 먹는 진득한 카레.

 

상견례 식사에 비하면 얼마나 평안하고 즐거운 식사들인가! 코스로 나오는 음식은 숨이 막히게 맛이 없었고, 특히 잡채는 말라 비틀어져, 기분을 더 잡쳐버렸다. 상견례는 우리네 혼인문화가 만든 지옥 중에 최고로 뜨겁고 어색한 지옥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고 착하고 성실하며 존경스러운 우리의 부모들은 예의와 성심을 다해 어린 것들의 미래를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찬찬히 상의했다. 나는 듬직해 보이기 위해 자세를 바로 했고, 애인은 겸연쩍은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바깥은 숨 막히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얄미운 정도로 쨍한 해가 떠올랐다. ! 마지막에 나온 수정과는 조금 맛있는 것도 같았다! 정말이지, 다 잘 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 길에 나서자 다시 비가 쏟아진다. 날씨에 감정이나 희망 따위의 정서를 무심코 투영하다니, 어리석었다. 인간은 날씨가 어떠하든, 어깨가 비에 흠씬 젖든, 정수리에 눈이 함박 쌓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이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존재. 그 와중에 그녀와 나는, 하나의 우산을 같이 들기로 하였으니, 그걸로 모두 되었다. 이토록 젖은 어깨도 언젠가는 보송보송 마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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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nnnn 2013.07.15 00:22

1. 적절한 속도

 

클라우디아는 아주 강한 아이예요.”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신경을 좀 써주려고 해요. 왜냐하면 이번 일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데다……

-산드로 베로네시 조용한 혼돈

 

 

운전하다 실수로 속도를 위반하면 벌금통지서가 집으로 날아든다. 거기엔 선명한 사진도 함께 있다. 운전하는 사람의 상반신과, 차량 번호판이 보이고, 운전석 옆자리는 프라이버시를 위해 가려주는 센스도 그들은 잊지 않는다. 내가 몇 번 걸려봐서 아는데, 벌금 낼 때 정말 돈 아깝다. 빨리 달려봐야 도착 시간은 3분도 채 단축되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왜 거기서 가속 페달을 밟았던가!

 

그녀가 몸의 이상을 알려왔을 때, 남자는 갑자기 시계 초침이 엄청나게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기뻤다. 우리 둘은 원래 결혼할 사이였고, 악독한 계절을 모두 보낸 후에 본격적으로 날을 잡기로 하였으나, 그 악독한 계절에 들어서자마자 애가 같이 들어섰을 뿐(이라는 변명을 누가 구구절절 들어주고 있겠는가?). 사내는 하루 정도 누운 상태로 계속 발차기를 했다. , 좀 빨랐다. 그래 좀 빨랐구나.

그 사내가 나다.

컴퓨터를 켜면 으레 연예 뉴스를 뒤지고는 하는데, 꼭 한 달에 한 커플은 결혼 발표를 했다. 기자들이 물어본다. 혹시 속도위반 아닙니까? 웃으며 대답한다. 절대 아닙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혹은 당황하며 말한다. 4개월입니다. 아이가 있어 더 행복해요. 다행히 내게 그런 하찮은 질문을 던질 기자는 없겠지만, 괜히 미안하고 민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누가 물어보면 대답해야 한다. 4개월이에요. 아이가 있어……

하지만 곧 세상에 나올 생명 하나를 두고 속도를 위반했네, 신호를 무시했네, 수군거리는 것은 심히 사나운 인심이 아닌가. 타인의 생활을 놓고 도로교통법에 의거하여 딱지를 붙이는 꼴이라니. 그러나 저러나 아이는 아이 나름의 속도와 박자에 맞춰 세상에 나올 준비를 다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누가 무엇을 위반하고 어긴 걸까.

아이에게 땅콩이라는 태명을 붙여주었다. 초음파 사진 속, 땅콩처럼 생긴 물체가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를 냈다. 땅콩 같아. 땅콩? 응 땅콩. 거센소리와 된소리가 입안에서 세상으로 터져나간다. 콜라처럼 톡톡 튀는 소리다. 땅콩. 땅콩, , .

속도가 없는 나라를 상상한다. 모두가 제 속도를 날 때부터 가진 도시를 그린다. 그 속도가 서로 부딪히지 않아 따로 속도를 잴 필요가 없는 마을을 떠올린다. ‘땅콩이는 그곳에서 생겨났다고, 그래서 우리 모두 위반한 것도 없고, 핑계될 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더구나 후회할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딱지 붙이지 마시라. 삶의 속도는 누구에게나 정당하다. 우리는 모두 이곳에서 저곳으로, 각자 온당한 결승점으로, 빠르게 또한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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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nnnn 2013.07.13 00:54

0. 은재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발견되고 모든 것이 가능했다. 막대는 칼이, 조약돌은 다이아몬드가, 그리고 나무는 성이 될 수 있었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은재는 21번째 염색체가 보통의 사람들보다 하나 더 많다. 이를 흔히 다운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다운증후군은 병명이 아니다. 특별한 염색체가 발생시키는 여러 불편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은재는 특별한 염색체를 타고났지만 알고 보니 그런 친구들은 많았다. 그러나 은재라는 아이는 단 하나다. 모든 아이가 그렇듯이. 나는 아이의 고유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내 특별한 아이가 평범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고, 자연스레 알고 보니 세상 모든 아이는 일반적으로 빠짐없이 특별한 게 자명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은재라는 이름을 미리 점찍어 두었다. 사랑하다는 뜻의 ,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처절한 복수에 나서는 스토리의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여주인공 구은재에게서 힌트를 얻긴 했지만. 그래서 어디선가 들은 것 같지만. 사실 세상 모든 단어는 필히 누군가가 입 밖으로 내어버린 것이고, 우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이는 다르다. 아이를 맞이한 부모 또한 달라야 한다. 나는 막 태어난 생명체가 가진 사랑의 재능을 아주 조금만 훔쳐, 세상 모든 단어를 다시 살핀다. 그렇게 은재 놀이에 열중하면, 종래 모든 것이 특별해 보인다. 덩달아 보통의 당신도 무척 근사해 보인다.

은재처럼 웃어본다. 평범한 세상에 이토록 특별하게 나타나주어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쑥스럽다. 대신 글을 쓴다. 아프거나 슬픈 사람이 없는 글을. 평범하지만 특별한 당신에게 들려주려고.

보통보다 하나 더 많은 염색체가 숲 속 반딧불처럼 책상을 비춘다.

 

이제, 시작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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