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서 와, 지구는 처음이지?

 

그런데 1억 광년 거리에 있는 어느 은하계에서 게시판 하나 솟아오른 것을 발견했지요. 그 게시판에는, <나는 너를 보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무서워서 그랬다. 한때 공무원 학원에 다녔었다. 대학 졸업 학기였다. 투명하지만 단단하고 뾰족한 벽이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학교 후문에 있는 80만원 정액의 9급 공무원 대비 종합반을 통해, 그 담을 뛰어넘으려 했다. 아님, 담의 일부가 되려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구를 함께 치던 동기와 같은 학원에 동시에 등록했다. 나름대로 안정된 미래를 꿈꾸며 짐짓 어깨를 폈던 것도 사실이다.

친구는 절박함을 안다. 늘 최선을 다하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당구를 치든, 중간고사를 보든,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녀석이 훗날 합격의 희소식을 들려주게 될, 시험을 치르고 학교 후문 유흥가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는 시험을 망친 것 같다며, 나에게 고기를 요구했다. 그는 절박하게 상추에 고기를 담아 입에 가져갔다. 그게 붙은 시험인 줄 알았다면, 돼지갈비 값을 내가 내지는 않았을 텐데.

그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자리를 차지한 정독실에서 친구는 영어 독해에 열심이었고, 나는 연습장에 시 비슷한 것을 끼적이고 있었다. 친구가 내 자리로 스윽 오더니 어깨를 툭 친다.

 

, 이 외계인 같은 놈아.

그냥 너는 지구를 떠나라.

거기서 시를 써라.

여기서 뭐하냐?

 

무서워서 거기에 못 갔는데, 그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라고, 어깨를 툭툭 쳐댔다.

 

*

 

부모님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소식을 듣게 된 건 교육청 공무원인 친구였다. 한창 근무 중이던 그는 속삭이듯 전화를 받다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사투리를 뱉었다. 뭐냐? 진짜냐?

무서웠다. 의사는 짧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 후, 진지한 얼굴로 복잡한 말을 했다. 절박유산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발사되었을 때, 나는 그걸 이미 유산이 됐다는 말로 알아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었다.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다. 절박유산은 임신 초기에 출혈이 있고, 출혈로 인해서 자연유산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증세라고 한다. 초음파 사진에서 아이의 자리 옆에 시커먼 뭔가가 있었고, 의사는 그것이 피라고 했다. 푹 쉬는 것이 최고라고 하면서. 우리는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바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무서움을 겨우 숨긴 나는 대신 끝없이 절박해져서, 괜찮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질린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서, 갑자기 과장된 몸짓을 하고서, 아내를 부축하고(그녀는 거부했다), 부산을 떨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그녀가 트위터 좀 작작하라고 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부리나케 병원으로 오고 있는 예비 장모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 때문에 질렸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무서웠다.

초음파 사진에는 거대한 우주가 있었다. 아주 시커멓거나 조금 덜 시커먼 것들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거기에 땅콩만한 은재가 들어 있었다. 절박하게 몸을 말고서. 훗날 절박유산이 염색체 이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얻었을 때도 도리어 아이가 더 대견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나오기 위해 너는, 최선을 다했던 거구나.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로 오려고. 무섭지 않았니?

 

고된 훈련을 받은 우주인처럼

모든 게 처음인 아이가

찬찬히 그리고 열심히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자신 아랫배에 자리한 작은 우주를 최대한으로 키워나갔다. 그녀는 곧 몸을 추슬러 병원 바깥으로 뱃속 우주를 꺼내왔다. 아이는 그곳에서 팔다리가 나오고, 표정이 생기고, 영양분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홀로, 덥고 재미없는 지구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가장 해야 할 일이 많은 이는 결국 아이였다. 나는 그 절박함을 따라서, 더 강건해지면 되는 거였다. 지구인이니까.

 

*

 

친구에게 어깨가 떠밀려 고시원에 돌아왔다. 일단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그리고 뭔가를 진지하게 끼적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자면, 누우면 발끝이 문턱에 닿았던 그 고시원은 사실, 우주를 떠도는 캡슐비행선이었다. 나는 시커먼 캡슐에 쭈그려 앉아 될 대로 되겠지, 중얼거리며 시를 썼다. 캡슐 바깥의 세상은 아름답고 무서웠다. 지구인 친구들이 절박한 마음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질감을 느끼려 노력하며 시를 썼다. 행성과 운성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비행은 결국 실패했다. 시 쓰는 일은 취업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완성된 시 중에 지금 갖고 있는 것은 한 편도 없다. 모두 우주 정류장에 버렸다. 다만, 어떤 태도를 완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걸 절박함이라고 불러도 될까. 약간은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무서움은 아니다.

공무원 학원에 계속 나간 친구는 가끔 방문을 두드리고 맥주를 내밀며 캡슐 속 나를 구출하곤 했다. 녀석이 아니었으면 난 우주 미아가 됐을 것이다. 훗날 알고 보니, 친구는 그날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잘 기억하지 못했고, 만약에 그랬다면 날마다 커피를 마시자는 둥, 당구 한 게임 치자는 둥 공부를 방해했던 나를 시야에서 없애버리기 위한 책략이 아니었겠냐며 반문한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귀한 시간이었다. 이윽고 나는 지구로 돌아왔다. 지금은 우주 속 아이의 귀환을 기다린다.

아이의 좋은 지구인 친구가 되고 싶다. 땅콩이가 마음껏 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때가 되면 아이의 어깨 툭 치며, 너의 세계로 전진하라고. 거기가 지구 바깥이어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을까. 달력 예닐곱 장을 넘기면 아이가 온다. 우리는 공무원처럼 점잖게, 지구인처럼 간절히,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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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nnnn 2013.08.3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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