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향하고 움직인다. 그들은 천천히, 어떤 장난의 기색도 없이 춤을 춘다.

-밀란 쿤데라 향수

 

물론 양수검사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숙제검사 같은 건가? 검사는 사람을 떨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나는 숙제를 잘해가는 학생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쉬는 시간에 친구 숙제를 재빠르게 베껴서 위기를 넘기는 타입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날 선생이 숙제를 내준 것을 깜빡 잊고 넘어가길 바라는 유형이었다. 운수에 제 몸을 완연히 맡기는 것이다.

쿼드검사가 먼저였다. 수치가 약간 높다고 했다. 높다, 낮다, 크다, 작다, 빠르다, 느리다…… 동사 앞에 자리하는 부사는 앞선 단어들을 흔든다. 흔들려서 초점이 흐려진다. 약간 높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약간이니까 괜찮은 건지도 몰랐다. 아니다.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약간도 하지 않았다. 약간이라는 말에 대해 여전히 자신은 없지만.

수치가 아주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양수검사를 받는 게 좋다고 의사는 말했다. 짧은 머리에 단정한 입매를 가진 여자 의사였다. 가운을 벗으면 같은 단지 아파트에 인상 좋은 아주머니라고 해도 될 성 싶었다. 나는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작은 눈이라 껌벅거리기 쉬웠다. 아내 또한 그랬다. 아내 눈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날 우리는 유난히 눈을 자주 감았다 떴다. 단정한 입매를 골똘히 쳐다보면서.

 

검사는 받지 않기로 했다.

 

초음파는 다른 의사에게 받아야 했다.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의사는 원래 곱슬머리인지 아님 미용실에서 펌을 한 것인지 머리카락이 심상치 않았다. ‘곱슬머리하면 내 머리도 만만치는 않다만, 의사는 게다가 반은 장발이었다. 그가 아까 피운 담배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왜 양수검사를 안 받은 거지요. 다음 검사까지 목둘레나 허벅지 길이가 이런 식이면 다운증후군이 거의 확실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담배냄새가 흰자위로 파고들어왔다. 눈이 매웠다. 자욱한 최루탄이 깔린 대로를 바라보는 소년처럼 불안해졌다.

정상 범위 안에 있네요. 그는 2주 후에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말이 짧았던 것 같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내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느낌 탓일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

 

검사를 받지 않길 잘했다.

 

검사 결과를 듣고 우리는 모종의 판단을 내렸어야 했을 것이다. 괴로웠을 것이다. 검사는 다른 검사를 요구했겠지. 우리는 우리 부부의 마음을, 심장을, 사랑을, 미래를 샅샅이 검사했을 것이다. 아주 탈탈 털어서, 먼지가 풀풀 날렸을 것이다. 우리는 콜록거리며 눈물을 핑계 대며 하기 싫은 숙제처럼 그 일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다. 그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지만, 그들과 같은 결정을 나 또한 선택했다면, 나는 나를, 아내는 아내를,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오래 두고서 바라보지 못했을 것 같다.

대신 다른 검사를 평생 감수해야 할 예감이다. 숙제는 했는지, 공부를 잘하는지, 건강은 유지되고 있는지, 신용이 좋은지 검사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내 선택 아닌 선택이 온당하고 바름을 증명해낼 것이고 그 일을 성실히 잘하고 있음을 검사할 것이다. 날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삶은 은근한 지속에 더한 가치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결국 내키는 대로 사는 자가 이룰 일이다. 나는 이일이 선뜻 내킨다.  

'은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검사에 대하여  (0) 2013.10.15
2-1. 젖은 마음  (1) 2013.08.30
3_어서 와, 지구는 처음이지?  (2) 2013.08.30
5_존중되는 취향  (0) 2013.08.26
2_폭우 속 우산  (0) 2013.07.15
1_적절한 속도  (0) 2013.07.13
by hyonnnnn 2013.10.15 00:29

6. 엄마가 말하길

후디니는 어머니가 쓰던 옷장 문을 열고 옷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

-E.L 닥터로 『래그타임』

아내는 난생처음 방문한 도시를 찬찬 살필 겨를도 없이, 그저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녀는 신접살림을 차리기에는 다소 작은 크기의 집을 천천히 둘러본다. 괜찮네, 이 정도면. 생각보다 넓어. 말하고는 눕기 편한 자리를 찾아서 몸을 뉘였다. 그리고 긴 낮잠에 빠진다. 내가 급하게 구해놓은 집은 사실 생각보다 더 비좁았고, 그 정도면 정말 안 괜찮은 ‘투룸’에 불과했지만, 잠든 아내가 내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따라 잠시 안도할 수 있었다.

결혼 준비의 시작은 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끝은 아마 집구하기로 정도가 되겠다. 말하자면 결혼 준비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참담했다는 이야기. 물론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덤벙거리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상경해, 온 동네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사투리를 뱉었다. 그래봐야 보여주는 집은 빤했다. 그것들은 좁고, 어둡고, 불편해보였으나 누군가는 거기에서 자고 먹고 사랑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선뜻 그러할 자신이 생기지 않는 집이었다. 가진 돈에 비해 욕심이 과했다. 쉽사리 계약을 하지 못했다. 발걸음은 터벅터벅 서울의 외곽으로, 거기에 더해서 서울의 바깥으로, 지하철에서 걸어서 먼 곳으로 버스를 타야 전철을 탈 수 있는 곳으로, 오래 걸어 버스를 타고 다시 오래 달려 전철역에 닿는 곳으로 향했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사투리가 자그마해졌다. 이것밖에 못해줘서 미안하다, 라고 말할까봐 짐짓 호기로운 척, 돈 모아서 늘리는 재미가 있지! 큰소리를 냈다. 우리는 서로 미안해하면서 서울을 빠져나갔다. 서울은 사람을 미안하게 만든다. 이유는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미안하다. 아무런 식당에 들어가 감자탕을 시켰다. 돼지고기 살을 바르면서, 어머니가 말한다.

맛이 하나도 없네. 여기는 어쩜 음식에 정성이 얄팍하대. 김치도 이게 뭐냐. 우리나라 고춧가루는 아닌 게 아주 확실해. 결혼하면 김치랑 반찬이랑 더 자주 보낼 테니까, 먹을 거 아끼지 말고 기죽지 말고 지내라. 아까 그런 집들은 못쓰겠더라. 그래도 결혼해서 서울로 처음 올라오는 내 식군데, 밝은 곳에서 시작해야지. 일단 밝은 집을 구해야겠다. 발품 팔면 나오겠지. 걱정 말거라. 어서 먹어라. 식는다. 서울은 원래 간장에 고기를 찍어 먹는 거냐? 별스럽다. 네 말이 맞다. 요즘은 크게 시작한다, 어쩐다, 하지만 원래 넓혀가는 재미도 있는 것이지. 엄마는 어쩌다보니 넓히면서 못살았다. 네가 커지면서 이상하게 점점 더 집은 쪼그라들더라만. (조금 웃음) 아까 봤던 집이 빛은 잘 들어오더라. 바로 앞에 공원이 있던데, 산책하기 좋겠든? 공원이라서 불량배들도 있고 막 그런 건 아니겠지? 하루 이틀 더 보고 아까 그 집 데려다 준 부동산에 전화하자. 사람 인상이 누굴 속여 먹게는 안 생겼더라. 내가 살다보니, 아들이 장가를 간다고 세상에 이렇게 같이 집을 보러 다닌다. 누군 아파트도 해주고 하다못해 전세라도 크게 해주겠지만 어쩌겠냐. 되는대로 살아야지. 평생 너 좁은 방에서 지내서 그것이 마음에 안 좋았는데, 결혼해서도 좁은 방에서 지낼 것 같아, 그것이 여간 안 좋다. 넓디넓은 방에서 큰 책상 놓고, 책장에 책들 가지런히 꽂아놓고 큰 창문 내어놓고 글을 쓰면 더 잘 될 것인데, 뭐든 그럴 것인데. 그렇지? 옛날부터 그랬다. 좁은 방에서 너는 나오지도 않고 혼자 거기에서 뭘 하는지 늘 궁금했어. 공부는 아니었을 테고, (또 웃음) 방에 오래 있는데, 그 방이 좁고 어둡고 그래서 그것이 안 좋았다니까. 너는 공부를 해도 엄마 몰래하고, 글도 엄마 몰래 쓰더라. 하긴 혼자 방에서 꼼지락꼼지락 하기에는 글이 딱 좋지. 이제 결혼하면 엄마는 진짜 더 모른다. 네가 더 좋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밟은 곳으로 점점 더 가. 그렇게 가라. 알아서 가라. 뭐 하냐, 안 먹고. 일단 먹고 가. 그래. 먹는다. 먹어. 먹다보니 먹을 만하네. 응. 먹자.

그날 계약했다. 액수는 정해져 있으니, 나오는 집도 거기서 거기일 터였다. 요행을 바라기엔, 어머니의 발품도 이제 한계가 온 것이 확실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엄마의 어린 아들이 되어, 집을 함께 골랐던 것이다. 결혼하면 그녀의 도움을 쉬이 받기가 겸연쩍겠지. 어머니가 봐둔, 공원을 앞에 둔, 좁지만 그나마 쓸 만한 연립주택의 주인이 전세대출을 흔쾌히 받아들여 다행이었다. 그것을 꺼리는 사람도 많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들의 생태계는 내가 아직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나는 다른 인간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오싹해진다. 부동산에서 계약을 하는 동안 그런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그럴 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도 같고, 여전히 이 모든 것이 어렵고, 모르는 것이 많다. 몰라서 미안하다.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 것은 서울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나의 일부였다. 그걸 염치라고 불러도 될까. 그때 감정에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민망하니까.

아내가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청소를 해야겠다면서 몸을 일으킨다. 구석구석 더러운 지점이 많다. 보고서의 오타처럼 눈에 띈다. 입술 근처 뾰루지처럼 거슬린다. 그것을 고치고 짜내기로 한다. 사실 나는 누운 상태로 보던 야구나 계속 보고 싶지만, 뱃속에 땅콩이를 담은 아내가 방에서 등을 떼면 나 또한 더 누워 있을 방도가 없다. 사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옳았다. 화장실 구석에 덜 닦인 곰팡이를 문지른다. 아내는 싱크대를 맡아서 광을 내고 있다. 안방도, 안방에 딸린 자그마한 베란다도, 다시 한 번 손봐야 한다. 작은방도, 작은방에 딸린 작은 창도 다시 닦아야 할 것이다. 생각보다 넓어서 골치가 아팠다. 좁기도 넓기도 한 우리의 첫 번째 집이 여기에 있다. 이곳에서 당분간 먹고 자고 사랑할 것이다. 젊을 적 어머니가 당신의 집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시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 철수세미를 쥔 손에 힘을 줘본다. 어쩐지, 손바닥이 아프다. 

'지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엄마가 말하길  (0) 2013.09.25
민어,라고 부르면  (0) 2013.05.27
by hyonnnnn 2013.09.25 22:59

2-1. 젖은 마음

 

우산 속에서 너는

내 손을 처음 잡아주었던 것 같다

나는 반대쪽 어깨가 흠뻑 젖었는데

젖어가는 마음이 좋아 그냥 두었다

















'은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검사에 대하여  (0) 2013.10.15
2-1. 젖은 마음  (1) 2013.08.30
3_어서 와, 지구는 처음이지?  (2) 2013.08.30
5_존중되는 취향  (0) 2013.08.26
2_폭우 속 우산  (0) 2013.07.15
1_적절한 속도  (0) 2013.07.13
by hyonnnnn 2013.08.30 17:17

3. 어서 와, 지구는 처음이지?

 

그런데 1억 광년 거리에 있는 어느 은하계에서 게시판 하나 솟아오른 것을 발견했지요. 그 게시판에는, <나는 너를 보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무서워서 그랬다. 한때 공무원 학원에 다녔었다. 대학 졸업 학기였다. 투명하지만 단단하고 뾰족한 벽이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학교 후문에 있는 80만원 정액의 9급 공무원 대비 종합반을 통해, 그 담을 뛰어넘으려 했다. 아님, 담의 일부가 되려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구를 함께 치던 동기와 같은 학원에 동시에 등록했다. 나름대로 안정된 미래를 꿈꾸며 짐짓 어깨를 폈던 것도 사실이다.

친구는 절박함을 안다. 늘 최선을 다하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당구를 치든, 중간고사를 보든,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녀석이 훗날 합격의 희소식을 들려주게 될, 시험을 치르고 학교 후문 유흥가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는 시험을 망친 것 같다며, 나에게 고기를 요구했다. 그는 절박하게 상추에 고기를 담아 입에 가져갔다. 그게 붙은 시험인 줄 알았다면, 돼지갈비 값을 내가 내지는 않았을 텐데.

그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자리를 차지한 정독실에서 친구는 영어 독해에 열심이었고, 나는 연습장에 시 비슷한 것을 끼적이고 있었다. 친구가 내 자리로 스윽 오더니 어깨를 툭 친다.

 

, 이 외계인 같은 놈아.

그냥 너는 지구를 떠나라.

거기서 시를 써라.

여기서 뭐하냐?

 

무서워서 거기에 못 갔는데, 그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라고, 어깨를 툭툭 쳐댔다.

 

*

 

부모님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소식을 듣게 된 건 교육청 공무원인 친구였다. 한창 근무 중이던 그는 속삭이듯 전화를 받다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사투리를 뱉었다. 뭐냐? 진짜냐?

무서웠다. 의사는 짧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 후, 진지한 얼굴로 복잡한 말을 했다. 절박유산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발사되었을 때, 나는 그걸 이미 유산이 됐다는 말로 알아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었다.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다. 절박유산은 임신 초기에 출혈이 있고, 출혈로 인해서 자연유산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증세라고 한다. 초음파 사진에서 아이의 자리 옆에 시커먼 뭔가가 있었고, 의사는 그것이 피라고 했다. 푹 쉬는 것이 최고라고 하면서. 우리는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바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무서움을 겨우 숨긴 나는 대신 끝없이 절박해져서, 괜찮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질린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서, 갑자기 과장된 몸짓을 하고서, 아내를 부축하고(그녀는 거부했다), 부산을 떨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그녀가 트위터 좀 작작하라고 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부리나케 병원으로 오고 있는 예비 장모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 때문에 질렸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무서웠다.

초음파 사진에는 거대한 우주가 있었다. 아주 시커멓거나 조금 덜 시커먼 것들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거기에 땅콩만한 은재가 들어 있었다. 절박하게 몸을 말고서. 훗날 절박유산이 염색체 이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얻었을 때도 도리어 아이가 더 대견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나오기 위해 너는, 최선을 다했던 거구나.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로 오려고. 무섭지 않았니?

 

고된 훈련을 받은 우주인처럼

모든 게 처음인 아이가

찬찬히 그리고 열심히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자신 아랫배에 자리한 작은 우주를 최대한으로 키워나갔다. 그녀는 곧 몸을 추슬러 병원 바깥으로 뱃속 우주를 꺼내왔다. 아이는 그곳에서 팔다리가 나오고, 표정이 생기고, 영양분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홀로, 덥고 재미없는 지구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가장 해야 할 일이 많은 이는 결국 아이였다. 나는 그 절박함을 따라서, 더 강건해지면 되는 거였다. 지구인이니까.

 

*

 

친구에게 어깨가 떠밀려 고시원에 돌아왔다. 일단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그리고 뭔가를 진지하게 끼적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자면, 누우면 발끝이 문턱에 닿았던 그 고시원은 사실, 우주를 떠도는 캡슐비행선이었다. 나는 시커먼 캡슐에 쭈그려 앉아 될 대로 되겠지, 중얼거리며 시를 썼다. 캡슐 바깥의 세상은 아름답고 무서웠다. 지구인 친구들이 절박한 마음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질감을 느끼려 노력하며 시를 썼다. 행성과 운성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비행은 결국 실패했다. 시 쓰는 일은 취업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완성된 시 중에 지금 갖고 있는 것은 한 편도 없다. 모두 우주 정류장에 버렸다. 다만, 어떤 태도를 완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걸 절박함이라고 불러도 될까. 약간은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무서움은 아니다.

공무원 학원에 계속 나간 친구는 가끔 방문을 두드리고 맥주를 내밀며 캡슐 속 나를 구출하곤 했다. 녀석이 아니었으면 난 우주 미아가 됐을 것이다. 훗날 알고 보니, 친구는 그날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잘 기억하지 못했고, 만약에 그랬다면 날마다 커피를 마시자는 둥, 당구 한 게임 치자는 둥 공부를 방해했던 나를 시야에서 없애버리기 위한 책략이 아니었겠냐며 반문한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귀한 시간이었다. 이윽고 나는 지구로 돌아왔다. 지금은 우주 속 아이의 귀환을 기다린다.

아이의 좋은 지구인 친구가 되고 싶다. 땅콩이가 마음껏 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때가 되면 아이의 어깨 툭 치며, 너의 세계로 전진하라고. 거기가 지구 바깥이어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을까. 달력 예닐곱 장을 넘기면 아이가 온다. 우리는 공무원처럼 점잖게, 지구인처럼 간절히,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은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검사에 대하여  (0) 2013.10.15
2-1. 젖은 마음  (1) 2013.08.30
3_어서 와, 지구는 처음이지?  (2) 2013.08.30
5_존중되는 취향  (0) 2013.08.26
2_폭우 속 우산  (0) 2013.07.15
1_적절한 속도  (0) 2013.07.13
by hyonnnnn 2013.08.30 17:13
| 1 2 3 4 |